이승만 정부는 과거 좌익 활동에 가담했던 전향자들을 보다 쉽게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하고 가입을 유도했다. 1949년 말까지 연맹원 수는 약 30만 명에 달했고, 그뿐만 아니라 좌익에 동조한다고 여겨지는 이들까지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정당한 재판 절차조차 없이 연행되어 구금되고, 처형되었다.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민간인 희생자 대다수는 좌익 사상을 가졌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만으로 학살당했다. 이러한 학살은 주로 전쟁 초기 군경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후퇴한 이후에는 적군에 부역했거나 그렇게 의심받은 이들을 상대로 한 보복적 성격의 학살이 반복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이처럼 학살된 민간인의 수는 관점에 따라 3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까지 추산된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은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 중 일부 이루어졌으나, 위원회 활동 종료 이후 정부의 추가 조사나 발굴은 중단되었다. 이에 시민들과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하고 직접 발굴에 나섰다. 공동조사단은 2014년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에서 첫 발굴을 시작해, 2022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곡계굴 미군 폭격 희생자’ 발굴까지 총 11차례의 유해 발굴을 진행하고, 수습된 유해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도 완료했다.
2020년 출범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다시 매장지 조사와 유해 발굴을 재개하면서 공동조사단의 활동은 이전보다 축소되었지만, 참여 방식이나 활동 형태를 바꾸어가며 여전히 발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적법한 재판 절차 없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학살할 수 있는가?”
“왜 희생자와 유가족들은 가해자의 사과는커녕, 억울함과 슬픔을 표현하는 일조차 사회적 금기가 되었는가?”
“학살 피해자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거나 그렇게 추정되는 장소들은 왜 지금까지 방치되어 있는가?”
공동조사단의 활동은 바로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 질문들은 수십 년간 증언과 기록 속에만 존재하던 사건의 구체적인 장면과 증거들을 실제 발굴을 통해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발굴을 통해 수습된 각 부위의 뼈와 유품(비녀, 유리구슬 등)은 희생자의 성별과 연령을 파악하는 주요 단서가 된다. 또한 희생자를 결박했던 도구, 현장에서 출토된 탄피와 탄두는 그동안 기록이나 증언으로만 전해지던 가해자를 추정하거나 입증하는 물적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해 발굴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복원하는 작업을 넘어서, 땅속 깊이 묻혀 있던 이들의 존재를 현재의 지표면으로 끌어올려 위로하고 기리는 ‘제의(祭儀)’의 성격을 지닌다. 동시에, 타의에 의해 지워진 이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냄으로써 이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물 수 있도록 만드는 ‘기억의 행위’이기도 하다.
“부역혐의로 아버지가 연행되어 가신 후 3일간 다른 사람들과 붙잡혀 계신 면사무소 창고로 도시락을 가져다드렸어요. 그마저도 직접 건네드리지 못하고 문 앞을 지키던 치안대원에게 전해주고 돌아왔습니다. 4일째 되던 날 도시락을 가져가니 이제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어린 시절이라 별생각 없이 도시락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제 이야기를 들은 형이 대성통곡했습니다. 돌려보낸 도시락을 보고 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안거에요.”
“산내 유족회 전숙자 회장의 아버지는 살인 누명을 쓰고 민간인 신분으로 위법하게 군사재판을 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은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전 산내 곤룡골로 끌고 가 학살했고 전숙자 회장의 아버지도 끌려와 돌아가셨다. 전숙자 회장은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군사법원이 아버지를 가해자로 지목한 살인 사건의 피해자 유족과 당시 마을 이웃들을 수소문해 얻은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62년 만에 무죄를 입증했다.”
"제가 동굴(단양 곡계굴) 안에서 너무 자지러지게 운 거예요, 다른 피난민들의 눈총을 받으니 쫓겨나다시피 동굴에서 나와 저를 데리고 서둘러 다른 곳으로 피신하셨어요, 그 덕에 미군 폭격에서 화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동굴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1948년 당시 아버지는 여수 14연대에 근무 중이셨어. 휴가차 전남 광산군 집에 오셨는데, 할머니가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 하시는 걸 뿌리치고 떠나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게 떠올라. 그렇게 부대로 복귀하시다가 광주에서 덜컥 연행되신 거야. 여순에서 난리가 났는데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고 잡히신 거지. 그렇게 1년 동안 행방이 묘연하다가, 아버지가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어. 행방을 알고 면회를 한 번 다녀왔는데, 그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여기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을 당하신 거야.
내가 아는 유족 중에, 어머니 손을 잡고 피난을 가다가 혼자만 살아남은 분이 계셔. 그날 미군 전투기가 머리 위를 휘휘 날더니, 별안간 피난 행렬을 향해 사격을 하기 시작하더래. 동생을 등에 업은 어머니가 본인 손을 꼭 잡고 뛰다가, 순간적으로 손을 앞으로 확 잡아당기며 밀면서 “너는 앞만 보고 뛰어라”고 하셨대. 그런데 보니까 동생과 어머니가 기총사격에 맞아 내장이 쏟아지며 쓰러지시더라는 거야. 그게 본인이 목격한 어머니와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그래. 그런데 최근에서야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규명 신청서를 제출해 답변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해당 지역의 미군 공중사격에 의한 희생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니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라”는 거야. 70년이 지난 그 전장에 무슨 증거가 남아 있겠어. 본인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증인인데, 도대체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냔 말이야. 어린애가 살아남은 것만도 기적인데, 그런 증거가 어디 남아 있겠어?
어머니랑 동생까지 같이 잡혀와서 창고에 붙잡혀 있었는데, 할머니가 어떻게든 손주들만이라도 살려보겠다고 물 좀 주겠다고 오셔서는 나랑 동생을 데려가려고 하신 거야. 그랬더니 어머니가 눈을 흘기며, 죽어도 나랑 동생을 내놓지를 않으시더래. 그래서 할머니가 장손이라도 데려가겠다고 애원하니까, 그제야 마지못해 나만 보내셨다는 거야.
할머니는 그때를 생각하면 “너희 어미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아이들이라도 곁에 있으면 설마 사람을 죽이겠나 싶어 그러셨던 것 같아.
여기 학살 장소 아래 살던 사람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날 사람들이 여기로 쭉 끌려와 학살을 당할 때 다다다다 총소리가 쉬지 않고 들리더니 어느 순간 조용해지더래. 그러고는 밤새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아침이 되니까 그 울음소리마저 사라졌다는 거야.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지만 무서워서 올라가 보질 못했다고 하더라고 평생 그 울음소리를 잊을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고 그래.
"아니, 겨우 세 살배기 아이가 무슨 부역을 했다고 죽여?"
내가 지금 지역 유족회장을 하고 있지만, 내 자식들은 내가 유족이라는 사실조차 몰라. 이런 기억이나 경험은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일절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어.
1950년 10월 9일 점심 무렵, 아버지가 마을 유지들이 모인 회의에 참석하신다며 나가시고는 그날로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다음날 탕정 지서에 끌려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삼촌이 면회를 가셨는데, 아버지가 어찌나 심하게 구타를 당하셨는지 한쪽 눈이 빠져 나올 것처럼 부어올라 있었다고 그러셔요. 그날 밤, 아버지는 여기 탕정 경찰지서 뒤편 야산으로 끌려가셔서 학살을 당하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정확한 장소와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저는 이 산 전체가 아버지 무덤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이렇게 왕릉보다도 큰 무덤이 어디 있겠냐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요.
내가 고작 다섯 살 먹었을 때, 아버지를 포함한 삼형제 모두 부역 혐의로 끌려가 학살을 당하셨습니다. 내가 너무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람에, 내 평생 아버지의 부정(父情), 그러니까 사랑이란 걸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컸어요. 내가 죽기 전에 아버지 뼛조각이라도 찾아 한 번 만져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어머니가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아산에서 평택 친척집으로 피난을 가려고 쑥개떡을 잔뜩 쪄서 이고 지고 집을 나서셨어요.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군 검문에 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게 된 거예요. 그때 군인 한 사람이, 위로 올라가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니까 죽여야 한다고 하더래요.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군인이 “죽이긴 왜 죽여, 그냥 돌려보내”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가 쑥개떡을 쫙 펼쳐놓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그게 그렇게 맛있다고 좋아하더랍니다. 그때 어머니 심정이 어떠셨을까, 지금 내가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인민군 점령 시기에 인민군들이 학교에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가르치게 하거나 인공기를 그리게 했는데, 천안 제3국민학교 교사셨던 아버지를 누군가 수복 후에 부역혐의자로 신고를 해버렸어요. 그렇게 끌려가 대전형무소에까지 수감되셨다가 무죄로 석방되어 나오셨는데, 그 사이에 가족은 열 명이 끌려가 억울하게 학살을 당했지요.
그 후로 아버지는 교사로 다시 복직은 되셨지만, 그 응어리를 풀지 못하시고 마음의 울화병이 커져 결국 돌아가셨어요. 나도 평생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연좌제라는 것이 불과 최근까지도 나를 지독하게 따라다녔어요.
Back to Top